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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김영하 저.

삶으로부터의 죽음이라는 해방

 이 책의 주인공인 '나'는 의뢰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토대로 소설을 쓰고 자살을 도와주는 일을 한다. 주인공은 의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쓸만한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을 직접 찾으러 다닌다. 

 

 그 의뢰인 중에 한 명은 유디트(세연)이다. 그녀는 모든 일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대화조차 이어나가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마지막 죽음을 선택할 때가 돼서야 자살하는 방식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두 번째 의뢰인은 미미라는 퍼포먼스 예술가이다. 그녀는 그전까지 자신의 모습이 영상으로 담기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비디오 아트를 기획하는 C에게 처음으로 자신이 예술행위를 보이는 모습을 찍는 것을 승낙한다. 하지만 미미는 그 이후 주인공을 다시 만나 자살을 택한다.

 

 사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용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액자식 구성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주인공의 자살을 도와주는 행위부터 의뢰인들의 삶의 태도까지 낯설고 섬뜩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소설의 전체적인 어두운 분위기와 회색빛으로 그려지는 세상에서 자살은 일종의 구원처럼 느껴진다.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죽음에 대한 다른 면모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사람은 딱 두 종류야.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과 죽일 수 없는 사람. 어느 쪽이 나쁘냐면 죽일 수 없는 사람이 더 나빠. 그건 K도 마찬가지야. 너희 둘은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종자야.
누군가를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은 아무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해.”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없는 사람이 더 나쁘다는 말은 언뜻 정신이 나간 말 같기도 하다. 살인이라는 것은 언제나 나쁘고 두려운 것으로 생각되어 왔으니까. 하지만 이 소설에서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자신이 진심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목적도 없고 삶의 이유도 찾지 못했을 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고통으로 느껴질 것이다. 어쩌면 그 사람의 자살(소설 속에서는 '구원'이라 표현되는)을 도와주는 것이 그 어떤 희생보다 더 큰 희생임과 동시에, 그 사람이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도 사실 아직 어려운 부분이 많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죽음에 대한 의미를 되짚어보게 된다. 죽음이야말로 스스로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도록 압박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본인이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오히려 사람을 비참한 죽음으로 내몰지는 않을까.